밀가루 알러지 쇼크

나의 불찰이 빚은 다소 심각했던 오늘의 사건.

 

언이가 오늘 오후 어린이집에서 국수를 먹고

밀가루 쇼크를 일으켰다.

쇼크치고는 아주 심하진 않았지만

나와 선생님은 깜짝 놀랐고

무엇보다 우리 아기가 너무너무나 힘들어했다.

(그리고 힘든 상황치고는 의연한 편이었다.ㅜ,ㅜ)

 

선생님 나름대로는

멸치육수는 조심시켜서 안 주려고 생각하시고,

원래 잔치국수인데 언이 것만 따로

안 매운 비빔국수로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어쨌든 신경은 써주신 거다.

 

사실 예전에 알림장에, 아기 혈액검사 결과

알레르겐이 확실한 게 난백과 밀가루라고 써드렸는데

그동안 달걀이 들어간 국과 반찬에 대해서만

자주 언급해 드리고

점심 전후에 있는 간식이 스파게티나 빵, 수프 같은 것일 때는

그냥 늦게 등원하고 일찍 귀가했더니 밀가루도

분명한 알레르겐임을 잊으셨던 것 같다.

선생님은 전혀 탓하고 싶지 않다.

좀 더 미리 이야기 못한 내 잘못이다.

 

오후에 고구마와 포도 간식을 준비해서 갖다 주려 했는데

고구마가 더디 익어 늦게 전화를 넣었던 거다.

4시 전에 걸었어야 했는데....4:30쯤으로 알고 있던

오후 간식이 이미 시작되어 국수는 먹은 다음이었고,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갈등....

두 돌 이후에 살그머니 달걀부터 테스트 시작하려 했는데

이왕 먹었으니 한번 결과를 보자고 생각하고

알겠다고 우선 그냥 지켜봐 주시고, 지금

언이 간식 가지고 간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에 지켜서 볼 수는 없어서 언이 몰래

간식만 전해 드리고 다시 집에 왔는데,

일을 하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정말 실수였다.

 

집에서 다시 선생님 전화를 받고 아기를 데리러 가니

얼굴이 빨개진 것을 물론이요, 손과 발도 빨갛게

팅팅 부어 있었다.

그런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지기 전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됐다고 하셨다.

아마도 기도가 부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기침은 가라앉았지만 우리 언이가 빨갛게 부어 가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얼른 병원에 가 소론도를 먹여야겠다는 말까지 해가며,

그럼 가라앉을 거라며, 주제에 담임 선생님을 대충 다독이고

유모차를 쌩하니 몰고 나와 소아과에 전화해 상황을 말했다.

 

그리고 유모차를 밀며 산본역사 안을 질주했다.

사람들이 피하고 쳐다보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저 '죄송함다~ 죄송함다~'를 외치며 뛸 뿐이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봐야

인턴들이 온갖 검사를 하며 시간을 잡아먹다가

별 고민도 없이 애 손에 바늘 꽂고

스테로이드 링거를 놔줄 게 뻔했다. 

그나마 다행히 진료를 늦게까지 보는 소아과가 있으니

결론은 하나.

주치의 정선생님 대신 파트너 의사인 비호감 이선생님

진료 타임이었지만 그와중에도 비호감 따위를 재고 있는 

한심한 나를 비웃으며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진료를 보고,

주사까지 맞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소견과 함께

항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제(소론도) 호흡기 치료 처방.

 

네뷸라이저에도 스테로이드가 소량 적용되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언이는 김 나오는 치료기가 싫어서 보채긴 했는데 

쇼크 탓에 기운이 없는지 며칠 전처럼 악쓰며 뻗대진 않았다.

 

나 혼자서도 어찌어찌 네뷸라이저를 마치고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다. 그제야 땀이 주룩주룩해서 옷소매로 땀을 닦으며.....

 

나와 언이를 알아보시는 약사 분이 깜짝 놀라신다.

밀가루 알러지 쇼크라고 간략 설명을 드렸다. 언이 약부터 얼른 조제해 주시고 바로 먹이라고 하셨다.

 

약까지 먹고 나서도 나는 약국을 떠나지 못하고

다른 아기와 부모들이 약국에 들어와 약을 받고 나가기까지

한참을 있었다.

도저히 언이를 데리고 이대로 혼자 집에 가

아기를 볼 엄두가 안 났다.

혹시 전혀 약이 안 들으면? 혹시 호흡이 곤란해지면?

 

약 봉투를 다시 읽었다. 하루 3회, 그럼 여덟 시간 뒤에 한번 더? 너무 길어, 여덟 시간은....ㅠ,ㅠ

 

약사 분께 물어봤다.

혹시 다음 번 약 먹일 때까지 전혀 차도가 없을 수도 있나요? 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에

약을 꼭 여덟 시간마다 먹어야 하는지 물었다.

지금은 네다섯 시간 뒤에 한 번 더 먹는 게 좋을 듯하댄다.

그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벌고 있는데

언이가 자꾸 눈을 비빈다. 상황이 이러니만큼

단지 졸려서 비비는 것 같지가 않다.

다시 복도 맞은편의 병원에 갔다.

 

언이가 눈이 거북한 것 같아요.(A: 점안액을 하나 추가하는 게 좋겠어요. 약국에 전화해 드릴게요.)

오늘 목욕을 하는 게 나을까요? (A: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휴진하려면 아직 시간이 몇십분 남았지만 환자는 없기에 슬슬 청소를 시작하는 간호사 샘들.

다시 약국으로. 안약을 넣는 건 처음이라

약사의 지도를 받으며 수 차례 실수 끝에 왼쪽 눈 성공.

역시 수 차례 시행착오 끝에 오른쪽 눈 성공.

 

약병 팁을 눈꺼풀에 닿지 않게 하고도

눈 주위로 잘못 떨어뜨리지 않기가 어려웠다.

차가운 안약이 들어가자 언이가 눈을 비볐고, 한 방울 더 넣는 게 좋겠다는 약사의 조언.

 

이렇게 몇 시간을 보낸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용기가 생겼다. 아마 언이도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과 함께.

사실 집에 와서도 혹시 밤중에 응급실에 가야 할까 봐,

미리 주변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지

아님 119에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 한데 안양권이 아닌 강남권이나 분당권의

대학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하나

이상한 고민까지 했다. 왜냐면 소아과 닥터리에게 응급실을

(가까운) 원광대로 가도 충분하겠냐고 확인하자

확언은 못하지만 눈치로 No라고 대답해 준거 같아서.

 

자꾸 아기 윗입술이 파랗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ㅎ...

의사가 알러지 반응 땜에 열감이 있어서 구분이 힘들 테니

잘 보라고, 만약 입술이 파래지거나

호흡이 힘들어지면 응급실로 가야한다고 했기 때문에

자꾸 입술을 보게 되었다.

 

자정 쯤에 알러지 약들을 한번 더 먹이기 위해,

지금 몇 시간에 걸쳐 틈틈히 이 포스팅을 작성하고 있는데

첫줄 쓸 때는 발갛게 부은 채

묽은 분유(물을 많이 먹이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를 먹고

잠든 아기가 지금은 군데군데 불그스름하고

팅팅 부은 손발도 많이 가라앉았다.

 

내 약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일단 기침이 자꾸 나서 그냥 지금

하나 남은 약봉지를 털기로 했다.

약을 먹으려니 수프를 일단 하나 데워야지. 

뭐... 하나밖에 안남았네. (이제 자정이 지났다.)

 

수프 먹고 약도 먹었음. 어제도 한숨 안 잤는데 오늘도 잠이..

by maki | 2009/04/16 03:17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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